너와 나의 세상 이야기/나의 이야기

짦은 하루

alps 2018. 8. 24. 13:42

첫 학기 수업으로 히브리어와 하나도 많은데 두개의 세미나를 택했다.

남의 신세 지지 않고 애를 데리고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수업을 택했고, 이곳저곳에서 놀러오라는 소리가 많이도 들리는 성탄절 휴가와 연말연시(年末年始)를 시간을 벌기 위해서 조용히 어린 것과 보냈다.  

아이가 탁아소에 가 있는 동안 먹고살기 위해 주당 20시간을 일을 하고 나머지는 국립도서관에 처박혔다. 아이가 돌아오는 늦은 오후에는 아이와 놀면서 저녁에는 이르지만 6시에 같이 잠자리에 들었다.

혼자 자라고하면 아무리 피곤해도 30분이상은 귀찮게 함으로 나도 지쳐서 아예 같이 잠자리에 눕는다. 그러면 녀석은 하루 종일 탁아소에서 뛰어 논 터라 단 10분이 안돼서 잠이 든다.

그러면 나도 한두 시간 같이 자고는 다시금 일어나서 새벽 두시까지는 책을 읽거나 뭔가를 썼다. 그럼 늦어도 아침 7시에는 일어나서

아빠, 그만 자아. 놀자 아!”

하고 내 머리 위를 뒹구는 아이의 재촉에 더 잘 수 없기에 밤을 새우지는 못하고 그렇게 하루 몇 시간을 자며 아이를 데리고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는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그런 것을 내가 열심을 낸다고 되는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한살 때 아이가 여섯 달이나 아파서 한 학기를 날렸고, 아이가 좀 괜찮아지자 이번에는 애 엄마가 갑자기 교통사고로 죽어 일년 이상을 놀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녀석은 아빠가 걱정하는 이상으로 명랑하고 건강하게 잘 자라 주었다.

어느 날이다.

갑자기 누가 방문을 두드려서 열었더니 아랍 계통의 아이들 셋이 서 있었다. 영민이 친구는 내가 웬만큼 아는데 그의 친구들은 아닌성싶었다. 그래서

무슨 일들이지?”

라고 묻자.

아저씨 아들의 열쇠를 우리가 주었어요!„

하면서 열쇠꾸러미를 돌려준다.

그래, 고맙다

그러자

사례금을 주셔야지요.”

하며 손을 내민다.

그래 얼마나 줄까?”

했더니

우리 어머니가 그러는데 적어도 5 마르크(한화 3000원 정도)는 받으랬어요.”

그래서 잔돈을 다 긁어 세 아이들에게 나누어주어 돌려보내며

역시 우리와 다른 문화에 사는 아이들이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아이에게

넌 언제 또 열쇠를 잃어 버렸었니? 벌써 이게 몇 번째냐? 열쇠 없으면 집에도 들어 올 수 없는데 아빠가 회사에서 늦게 돌아오는 목요일은 어쩌려고 그러니?”

하고 나무랐지만 그런 나의 꾸지람이 녀석에게는 단 몇 분도 안 간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에 혼자 내가 또 쓸데없는 잔소리를 하고 있구나!’ 하면서 실소를 머금고 내 방으로 돌아오면서 문득 그런 어린 녀석의 행동에서 새로움을 배운다.

자기의 친한 친구인 혜우나 필립(Phillip)은 어쩌다 무엇을 들고 와서 그렇게 오래 놀다가도 돌아 갈 때면 거의 잊지 않고 자기 물건을 챙겨서 가는 것을 보면서 영민이가 그런 태도에 단 10퍼센트라도 따라하기를 바랬지만 그것은 정말 나의 커다란 바람일 뿐 학교 갈 때 책가방까지 손에 들려주지 않으면 그냥 빈털터리로 학교로 가는 아이다.

그래서 남들은 아직 한 번도 안 잃어버리는 사물함의 열쇠도 벌써 두 번이나 잃어버려 그때마다 배상해야 했고 아침에 쓰고 간 우산은 아직 한 번도 집으로 도로 갖고 온 적이 없다. 교회에 가서는 성경과 찬송가를, 친구들 집에는 들고 간 장난감들을 챙겨 오는 예가 없다. 그래서 담임선생님이 나의 아들에게는 그 이튿날 준비물은 특별히 노트에 써 줘야 한다고 투덜대지만 난 오히려 그것 때문에 위로를 받는다.

어린것이 잘 잊어버리지 않는 성격이라면 위로해 줄 엄마 없이 바쁜 아빠 밑에서 겪는 외로움이나 부족함을 어떻게 이기겠는가?

친구들이 종종

, 넌 엄마도 없니? 난 너의 엄마 학교에 오는 것 한 번도 못 봤다.”

라면서 아무렇게나 던지는 말에 가슴이 철렁하고 자기 나름대로 상처를 받겠지만 그것마저도 너무 쉽게 잊어선지 아이의 얼굴에는 종종 남에게서 듣는 이야기지만 어두운 그림자가 없다고 한다.

그렇지 않고야 저 어린것이 그 나이에 절실히도 필요한 엄마의 사랑 없이 어떻게 밝게 클 수가 있겠는가? 그런 점에서 아이의 그런 심한 건망증이 내게도 자기에게도 도움이 된다. 그래서 엄마 없이 벌써 6년을 잘 견디고 저렇게 잘 살아가나 보다. 오히려 외로운 것은 아빠요, 한숨을 깊게 내 쉬는 것은 역시 아빠일망정 아이는 오늘도 모든 것을 알뜰히 잊어버리고 산다

물론 그 때문에 나의 주머니 돈이 줄기야 하겠지만.

그런 아들 덕분에 짧은 겨울 학기 석 달에 결국 세미나 둘을 해냈다. 4년 내에 단 하나도 해내지 못했었는데. 더구나 그 학기마저 다른 탁아소는 한 주일도 안 하는 성탄절 방학을 4주일이나 하고, 그리고 교회 내외(內外)에서 오해에 얽혀 개인적으로 무척 어려움을 겪던 시절에 해 낼 수 있었다. 4년의 세월 동안 성적이 든 학점은 지금 처음 땄다. 그것도 한 학점이 아니라, 이 학과를 졸업하기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 될 전공필수 4학점이다.

이어서 두 번째 학기에 고전어 시험이 있다. 그렇다고 지금의 사정이 만족스러운 것도 아니다. 늘 저녁 늦게 세미나 열고 있는 교수와 논문을 써 가야하는데 아직 아이를 어디에 맡겨야 할 지 장기 대책이 없고, 그리고 우리의 생활비가 점점 목을 졸라 와서 그전처럼 아이에게 넉넉히 과일 하나 못 사 줄 형편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어진 여건 하에서 최선을 다하겠다는 것이 죽은 아내의 무덤 앞에서 나 자신과의 약속이자, 아들과의 다짐이다.

이게 사랑하는 사람을 땅에 묻고 그 위에 흙을 뿌려 본 사람이 가지는 남다른 깨달음이요, 30 마르크(18000)를 가지고 한 아이를 데리고 한 달 끼니를 이어 보려고 아등바등해 본 사람이기에 빵의 참 맛을 알게 된 후 생기는 끈기요, 힘이다.

그것은 절벽의 나무뿌리를 움켜잡고 추락하지 않으려고 몸부림쳐 본 사람이라야 삶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를 알게 되는 것과 같이 아주 절실하고 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