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법/율법과 종교

종교개혁자들의 이자율에 대한 견해

alps 2015. 10. 5. 14:15

초기 선교사들이 전라 충청지역의 근대사에 미친 정치, 경제적 영향

-조남현 박사-

 

 

1. 들어가는 말

2. 개신교의 경제사상

2.1. 마틴 루터

2.2. 칼빈

2.3. 영국 교회

3. 미국의 개척자 청교도의 경제사상

4. 미국 장로교회의 경제사상이 한국 선교에 미친 영향

5. 나가는 말

연구 참고 문헌

A. 외국어 문헌

B. 한국어 문헌

 

 

1. 들어가는 말

 

구한말에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 올 때 성경만 가지고 온 것이 아니다. 그들이 카톨릭이든지 개신교든지 그들은 그들이 몸담은 기독교와 정치, 경제 문화를 같이 가지고 왔다. 이것을 정치 경제적 용어를 빌리자면 그들은 자본주의 국가에서 습득한 문화를 같이 가져 왔다는 것이다. 결국

 

선교사들은 한 손에 성경책과 다른 한 손에 자본주의를 들고 들어왔다.”

 

라고 한 마디로 요약 할 수 있다. 역사가 그것을 알려 주고 있다. 예를 들면 1866년 토마스 목사의 순교와 관련된 미국 상선(商船) 제너럴 셔먼호는 통상을 요구하다 거절당함으로써 일어난 사건이었다. 셔먼호가 평양 경내에 정박하는 것을 보자 평안도 관찰사 박규수(朴珪壽)는 셔먼호에 사람을 보내어 평양에 온 목적을 물었다. 그리스도교 선교사 토머스는 백인들의 국적을 소개하고 내항(來航) 목적에 대하여서는 상거래뿐임을 강조하며, 그들이 가져온 비단자명종 등과 쌀사금(沙金)홍삼(紅蔘)호표피(虎豹皮) 등과의 교역을 제의하였다.

이것을 계기로 신미양요가 일어났으니 1871(고종 8) 미국이 1866년의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빌미로 조선을 개항시키려고 무력 침략한 사건이었다.

또한 그 이전에 귀츨라프라는 선교사도 당시 무역을 독점하고 있던 영국의 동인도회사 소속 로드 암허스트(Lord Amhust) 중국의 북쪽과 한국, 일본 및 대만을 순방하는데 통역 겸 의사로 초청을 받고 모리슨과 번역한 한문 성서와 전도지와 선물을 갖고 1832227일 암허스트호는 광동을 출발하여 대만 복주, 영파, 상해를 거쳐 717일 장산곶에 도착하였으나 그는 선교의 목적은 숨기고 오히려 통상의 목적을 홍주목의 관리에게 전하여 조정에 알리게 했다는 것은 89일 한양에서 나온 특사의 우리는 통상을 할 수 없다한 말로도 알 수가 있다.

물론 다른 한편으론 선교사들의 목적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알리려는 목적만으로 온 부류도 있겠으나 그들은 결국 교육을 통하여 우리의 士農工商이라는 유교의 전통이나 문화와는 색다른 서구의 문화 즉 공업이나 상업이 농업이나 선비의 학문보다는 앞선 자본주의 경제사상을 성경과 더불어 가르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한국의 초기 유학생들은 대부분 교회나 선교사들의 주선으로 기독교 대학을 진학하게 되었고 그것은 삼일운동이나 해외 독립운동가들에게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경제 사상도 모두 같은 것이 아니라 중세의 종교 개혁자들 사이에 즉 칼빈과 루터와 그리고 청교도의 사이에는 서로 상당히 차이가 있다.

 

따라서 이 本考에서는 이들 선교사들의 본거지인 미국 기독교의 경제 사상을 중심으로 그들이 어떤 경제관을 가졌으며 그리고 어떻게 우리에게 그것을 접목시켰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따라서 그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경제학의 기초 이론을 도입하여 설명코자 한다.

 

이러한 문제를 다룬 책이 많지만 여기서는 특히 이 분야에 잘 알려진 영국의 학자 Tawney, R.H.Religion und Frühkapitalismus Bern 1946 독일어 버전이나 또는 영어 버전 R.H. Tawney: Religion and the rise of capitalism. London 1926. 한국어 번역은 숭전대 교수 이경식 박사와 평론가 김종철의 종교와 자본주의의 발흥등이 있으나 본 논문에서는 주로 독일어 번역을 중심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2. 개신교의 경제사상

 

중세의 암흑시기에 종교의 부패가 마틴 루터나 존 칼빈, 쯔빙글리 등을 나오게 만들었다면 영주들이나 귀족들의 가 결국은 상업주의나 산업화를 만들어 내게 했다. 여기서는 그들의 모든 경제 사상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종교 개혁자들의 경제사상 그것도 모든 경제 사상이 아니라 당시 문제가 커서 마틴 루터나 칼빈 등의 종교 지도자들이 간과 할 수 없었던 고리대금업에 관한 경제 사상로 하여 그들의 정신 속에 일어난 청교도와 루터교, 프로테스탄트 등이 어떻게 경제 사상을 이해하고 어떤 이론에 근거하여 신학을 그리고 신앙생활을 하게 했는가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이런 이론의 설명을 위해서 다음과 같이 약간의 경제학 기초 개념을 도입하고 한다. 인간이 어떤 재화를 사고 파는 즉, 그런 재화의 수요와 공급이 있으며 그런 수요와 공급에는 다음과 같은 기본 원리가 있다. 그것을 그래프로 그린다면 수요곡선과 공급곡선이 되겠는데 그것을 다음과 같이 그릴 수가 있을 것이다.

수요곡선(D: demand curve)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가격 S

하강하는 곡선의 형태로 그려지는데 이는 어떤

재화의 가격과 그 재화에 대한 수요량이 서로

의 관계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한 재화의

가격이 내리면 그 재화의 수요량이 증가하고 P E

가격이 오르면 수요량이 감소하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반대로 공급곡선(S: supply curve)

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하강하는 곡선의 형태로

그려지는데 이는 한 재화의 가격과 그 재화에 대한 D

수요량이 서로 (+)의 관계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한 재화의 가격이 오르면 그 재화의 공급량이 0 Q 수량

증가하고 가격이 내리면 공급량이 감소하는 관계를 나타낸다.

 

따라서 시장 가격의 결정은 수요곡선과 공급 곡선이 만나는 점 E에서 가격의 균형을 이룬다고 한다. 이는 이론적으로 수요자나 공급자의 욕구가 일치되는 곳이기도 하다. 이런 시장의 원리에 대해서 경제학의 고전학파 창시자 아담 스미스(1776)는 그의 유명한 저서 국부론에서 모든 경제 주체에게 자유로이 경쟁을 하도록 둔다면 국가의 부가 일어난다는 자유경쟁을 핵심으로 즉 아무런 사전에 제한을 하지 않고 그냥 개개인의 자유경쟁에 맡기면 보이지 않는 손(unsichtbare Hand)에 의해 저절로 경제의 질서가 확립되며 국가의 부를 가져온다는 자유주의 경제사상을 성립시켰다. 따라서 이런 자유스러운 경제 활동을 저해하는 국가의 간섭이나, 통제 또는 보호를 지양하고 오히려 국가는 국방이나 치안 등의 역할에만 치중하라는 이른바 야경국가관을 가졌다. 이것이 18세기 후반 영국에서 일어난 산업혁명을 계기로 시작하여 약 100년 간 최강 최대의 자본주의를 만든 산업 자본주의로 발달하였다.

 

2.1 루터의 경제사상

 

그런데 마틴 루터나 칼빈이 이런 자본주의 초기 시대에 살았기에 그들 역시 나름대로의 어느 정도의 신학적인 이론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고리대업에 대한 길고 짧은 설교에서 루터의 경제 사상을 알 수가 있는데 그는 푸거가(Fugger)와 영적 공동체에게 재갈을 입에 물려야 하며 고리대업은 어떤 미덕(Tugend)이 아니라, (Sünde)며 수치다(Schande)” 라고 강조하였다.

이것은 또한 귄터 파비웅크(Günter Fabiunke)가 간파했듯이 누가 빌려준 돈의 백분의 5 또는 6 즉 원금의 5%6%의 이자를 받는 것은 고리대금업자이고 그들은 욕심과 마몬(Mammon) 신을 섬기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마틴 루터의 사상은 받아드리기

어려운 경제적 문제가 있다. 이자율

당시의 이자율이 10%이상이던 때에 5-6% 이상 S

받지 못하게 한다면 한편으로는 그의 경제 사상이 P2

그가 주장하듯이 농민들이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것 같이 들릴지 모르나 그것은 시장의 기능을 P E

이해하지 못한데서 온다. 왜냐하면 도표에서 E

돈을 필요로 하는 사람과 돈을 빌려주는 사람과의 P1

사이에서 균형 이자율 즉 당시의 시장 이자율 12% D

라고 가정한다면 E는 곧 12 %이다. 그런데 루터가

주장하는 이자율은 그 보다 상당히 낮은 5% (P1) 라고 0 Q2 Q Q1 Q

한다면 그래서 사회에서 그 이상을 못 받게 한다면

이는 수요의 원리에 따라 이자율이 더 낮아 졌음으로 오히려 수요가 더 늘어서 Q에서 Q1로 될 것이나 그러면 돈을 가진 사람들은 그런 이자율에는 돈의 일부 즉 Q2 만큼만 빌려주고 나머지는 수익이 더 좋은 곳에 투자를 할 것이다. 따라서 돈을 빌리려는 Q1Q2 만큼의 돈을 빌리려는 사람들이 빌리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반듯이 돈을 빌려야 하는 사람들은 이런 5%의 혜택으로 돈을 빌리지 못하게 되면 정식 시장에서 빌릴 수가 없고 암시장에서 오히려 원래 12%의 이자율 보다 높은 P2 에서도 빌리게 된다. 이는 원래의 시장의 원리에 맡겼던 12 % 보다도 높은 것으로 역효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그는 판매자가 받고 싶은 대로 또는 마땅히 받아야 하는 가격 보다 더 비싼 가격으로 받으려는 商行爲(Verkaufen)에 있어서도 너희는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라(712)” 라는 이 계명 안에서 하라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루터의 이런 보수적인 경제적 사고는 마태 복음의 빌리려는 자에게 거저 빌려 주라라든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계명에는 따르지 못하지만 그래도 이어서 보게 되겠지만 칼빈이나 청교도의 경제 사상보다는 보수적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토니(Tawney)도 루터는 맨할히톤과 더불어 농부가 가장 좋은 직업이며 대장장이나 구두공과 같은 기술자도 사제직 처럼 진실한(ehrlich) 직업이라고 하면서 상행위를 통하여 욕심으로 이익을 남기려는 것은 죽음에 이르는 죄며 그것은 자신과 그리스도인을 하게 한다고 간파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독일 선교사 귀츨라프가 한국에 처음으로 와서 충청도의 고대도 사람들에게 감자를 심는 법을 알려는 주면서 선교를 시작한 것은 꼭 우연의 일치라고만 볼 수가 없을 것이다.

 

2.2. 칼뱅의 경제사상

 

 

토니(Tawney)의 분석에 따르면 칼뱅 역시 고리대업자를 도적으로 간주하기도 하지만 그는 대 무역상이나 은행, 재정, 돈거래 등의 상행위를 처음부터 인식하고 인정하였다고 하였다. 하지만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것은 농부가 밭에서 소산을 얻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았다.

그는 농부나 광부의 환경에서 자란 루터와 국가의 재무관리로 있던 가정에서 자란 이유에서인지 칼뱅의 경제사상은 당시의 쯔빙글리나, 루터 혹은 맨할히톤과는 훨씬 앞선 생각이었다. 따라서 자본가를 근원적으로 죄인으로 보지 않았고 상행위를 이웃사랑으로까지 확대해석 하지 않았으며 처음으로 체계적인 종교적 가르침과 경제적 미덕을 같은 차원에서 보았다.

 

또한 고리대업에 관해서도 칼뱅은 약제사의 독약(geht mit dem Wucher um der Apotheker mit Gift)”이라는 차원에서 이해를 한다. 즉 약제사가 몸에 해로운 독을 아픈 사람을 고치는데 잘 쓰면 오히려 약이 된다는 의미로 이해하려 한다. 이는 루터 보다는 상당히 진보적인 경제 사상이다. 하지만 그 역시 신학자로 지나친 이자율은 제한해야 한다고 했으며 또 가난한 자들에게는 거저 빌려주어야 한다고 하여 이중적인 경제 사상을 주장했으나 기본적으로는 고리대업을 인정하고 있다.

 

이러한 칼뱅의 진보적인 경제사상은 당신의 초기 자본주의의 원리를 인식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그의 경제사상은 이어서 설명되어지겠지만 영국과 미 대륙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에게 기독교 경제사상에 밑 걸음이 되었다.

 

2.2. 영국교회의 경제사상

 

토니(Tawney)는 영국의 교회의 경제 사상은 시민법에서는 루터 보다는 칼뱅주의에 더 가깝지만 교회법은 오히려 루터처럼 보수적이었다. 따라서 교회법은 여전히 고리대업이나 상행위에 대하여 금지하거나 위반의 경우 경고나 벌금형이 주어졌고 시민법은 훨씬 관용적이 이었다. 윌슨의 대담(Wilsons Dialog)에 보면 누가 자기의 돈을 거저 빌려주는 미친짓을 하겠는가? 자기의 재산에서 가능하면 많이 이식을 취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누구인가?” 라는 질문의 의도에도 함축되었듯이 상행위나 돈 거래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1545년과 1552년 사이에 최고 이자율의 제한과 함께 의회의 결정으로 고리대업은 인정되었다. 하지만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교회법(kannonisches Recht)은 여전히 수용되지 않아서 당시에 교회법이 우선 적용되어 고리대업자들에게는 벌금형이 내려 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적용에 있어서도 항상 교회법이 우선은 아니라서 때로는 시민법에 따라 무죄가 때로는 교회법에 따라 경고되어지거나 유죄가 되었다.

 

결국 1571년에 많은 논쟁 끝에 다시 이자를 받는 것은 허락되었으나 10%를 넘기지 않도록 하여 역시 루터의 5-6% 보다는 칼뱅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2.3. 청교도들의 경제사상

 

 

청교도(Puritaner)들은 비록 영국의 개신교도들이기는 하지만 그들의 경제 사상은 영국 교회의 경제사상 보다는 훨씬 진보적이었다.

17세기 청교도의 승리는 로마와 영국국교회에 대한 신앙의 자유 이외에도 정치와 경제로부터의 자유이자 인간에 대한 낡은 사상으로부터의 인간 개인성의 자유였다. 따라서 청교도들에게는 종교의식(宗敎儀式: Sakrament)은 불필요하거나 또는 지나친(überflussig)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지상의 노동은 종교의식의 한 형태로 보았다. 그래서 일은 하나님이 포도원에서 일꾼을 부르듯이 정신적인 훈련의 한 형태(eine Art geistlicher Übung)’로 간주했기에 직업은 가진다는 것은 자랑스러웠고 그래서 부지런히 일하는 것 그 자체가 하나님에 대한 의무이자 믿음의 표현으로 보았다.

그것은 중세의 노동은 천한 것으로 알던 로마 교회와 사제들의 사상과는 상당히 다른 것으로 이러한 노동에 대한 사랑과 땀이 미국의 기독교 사상의 근본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고리대(Wucher)에 대해서도 커다란 반대의 의견 없이 받아드려졌다. 이렇게 고리대가 죄라는 초기 종교개혁자들의 보수적 경제사상에서는 벗어났지만 그러나 과부나 고아 또는 나약한 자들에게는 역시 고리대의 이익이 나누어져야 한다는 사고는 역시 기독교적이었다.

4. 미국 장로교회의 경제사상이 한국 선교에 미친 영향

 

이러한 청교도의 경제사상은 결국 미국 감리교, 침례교 그리고 장로교의 일반적인 경제 사상이 되었고 이런 경제 사상은 미국이 세계적인 경제 강국으로 만드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는 史學者나 경제학자나 같은 귀결일 것이다. 또한 이러한 경제사상은 선교에서도 그대로 반영될 것이다. 물론 그러한 경제 사상이 얼마만큼 선교에 반영되고 한국의 경제에 영향을 미쳤는지는 다음 장에서 좀 더 확실하게 보게 되겠지만 확실한 것은 그들의 종교도 그들의 경제 사상도 100% 그대로는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까지 보았듯이 그러한 경제 사상은 지역과 문화 그리고 시대에 따라 변화하였기 때문이다.

 

4.1. 초기 선교사들의 입국과정

처음에도 밝혔듯이 초기 선교사들은 국적의 여하에 불문하고 단독의 선교 차원에서보다는 이미 중상주의의 이익을 경험했던 무역을 목적으로 한 상선의 도움으로 한국의 입국을 시도하게 된다. 그래서 독일의 저명한 저널리스트 빈프리드 쉬라우(Dr.phil. Winfried Scharlau)가 최근에 내 놓은 책 “1831년에서 1833동안 세 번의 중국 해안에 관한 귀츨라프의 보고서들이라는 책에서 “19세기에 어떤 중국의 저자들도 당시 귀츨라프가 속했던 회사들의 행동을 긍정적으로 보지 않았다고 서두를 떼면서 "Gützlaff는 목사이자 해적이며...“ 라는 표현은 우리 개신교의 교회사에서 보여주는 것과는 달리 왠지 좀더 자극적이며 객관적인 사실을 잘 보여 주는 것 같다.

아무튼 귀츨라프는 당시 무역을 독점하고 있던 영국의 동인도회사 소속 로드 암허스트(Lord Amhust) 중국의 북쪽과 한국, 일본 및 대만을 순방하는데 통역 겸 의사로 초청을 받고 모리슨과 번역한 한문 성서와 전도지와 선물을 갖고 승선하였다. 1832227일 암허스트호는 광동을 출발하여 대만 복주, 영파, 상해를 거쳐 717일 장산곶에 도착하였다. 이러한 귀츨라프의 來韓은 가톨릭에선 여러 번 시도가 있었지만 개신교로선 최초의 선교사로 기록되어지고 있다.

귀츨라프 일행은 그곳을 떠나 충청도 홍주만 고대도(古代島)에 도착하였다. 당시 홍주목 관리를 만나 선물을 주고 국왕에 보내는 청원서를 전달하였다. 그들은 국왕의 회답을 기다리는 동안 한국인들과 접촉을 하여 성서와 선물을 주었고 감자를 심는 법을 가르쳐 주는 한편 약도 나누어 주었다.

89일 한양에서 특사가 왔다. 그는 귀츨라프가 준 성서와 선물을 돌려주고 통상을 할 수 없다고 통고하였다. 따라서 당시 귀츨라프가 보낸 청원서의 내용은 선교라는 차원에서의 내용이 아니라 무역을 하자고 제의하였었던 것 같다. 이에 대하여 1차 자료를 습득한다면 더더욱 확실시 될 것이다. 아무튼 이러한 통고로 귀츨라프는 한국에 정식 입국하여 활동하지 못하고 한국을 떠나게 되었다.

이러한 방법과는 달리 무력을 동원하였던 미국의 셔어만호의 평안도 진입은 결국 당시 대원군의 의지를 굳히는 결과가 되어 문화개방이 늦어지게 되고 따라서 일본의 침략을 받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당시 평양감사였던 박규수는 조정의 허락도 없이 대동강을 질주해 들어오던 셔어만호를 맞아 통상을 거부하고 퇴각할 것을 경고하였으나 이를 어기고 계속 진입하던 셔어만호를 무력으로 불태워버리고 승무원들을 죽였다. 여기서 한국에 전도의 목적으로 들어오려던 미국의 로버트 토마스(Robert J. Thomas) 목사가 순교하게 되었다.

 

이어서 병인박해가 있었는데 이 사건의 원인(遠因)은 당시 시베리아를 건너온 러시아의 남하(南下) 정책에서 비롯되었다. 1864(고종 1) 러시아인이 함경도 경흥부(慶興府)에 와서 통상하기를 요구하였을 때 대원군 이하 정부요인들의 놀람과 당황은 대단하였으나 이에 대한 대책은 속수무책이었다. 이때 조선에 와 있던 몇몇 가톨릭 교도들은 대원군에게 건의하기를 한3국동맹을 체결하게 되면 나폴레옹 3세의 위력으로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을 수 있다 하여, 대원군으로부터 프랑스 선교사를 만나게 해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그 시기를 놓치고 말았으니 당시 지방에서 포교하고 있던 다블뤼 주교와 베르뇌 주교가 서울에 돌아왔을 때는 조정에서 이미 러시아인의 월경과 통상요구가 시일이 경과하여 한낱 기우(杞憂)에 지나지 않았다고 생각하였을 때였다. 그리하여 3국동맹이 체결되면 포교의 자유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선교사들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오히려 그들은 지둔(遲鈍)과 무책임한 주선(周旋)의 발설로 비난을 받게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가톨릭교를 서학(西學)사학(邪學)이라 하여 배척하던 당시, "운현궁(雲峴宮)에도 천주학(天主學)쟁이가 출입한다"는 소문이 퍼졌고, 조대비(趙大妃) 이하 정부 대관들이 가톨릭 교도의 책동을 비난하자 대원군은 이들 가톨릭 교도롤 탄압하기로 결심하였다.

 

1866년 가톨릭교 탄압의 교령(敎令)이 포고되자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9명이 학살당한 것을 필두로 불과 수개월 사이에 국내 신도 8,000여 명이 학살되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아직도 체포되지 않은 3명의 프랑스 신부의 행방을 찾고 있었고, 이 사건으로 산 속에 피신하여 쫓겨다니다가 병으로 죽고 굶주려 죽는 부녀자와 어린이가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이때 탈출에 성공한 리델 신부가 톈진[天津]에 있는 프랑스 해군사령관 로즈 제독에게 이 사실을 알림으로써 병인양요가 일어났다.

 

4.2. 당시 한국의 정치 상황

 

숭실대 부설 한국기독교박물관에 가면 그가 남긴 암허스트호 항해기(영문)을 볼 수 있는데, 조선 서해안 기사는 극히 적은 부분이지만 그의 조선에 대한 유별난 관심을 엿볼수 있다. 여기서 그는 조선의 첫 인상을 이렇게 적고 있다. "이 나라의 토지는 비옥하고 물도 풍부하지만 주민은 얼마 없고 개발도 안되었다그만큼 밉살스런 쇄국제도를 엄격히 지키는 나라는 어디에도 없는데" 당시 조선은 순조(純祖·재위 1800~34) 통치 말년으로 가톨릭 교도들이 수 십년간 엄청난 박해를 받고 김조순을 중심으로 안동 김씨가 세도를 부릴 때였다. 정치는 문란해지고 민생 이 도탄에 빠져 각종 참설(讖說)이 유행하는 등 민심이 흉흉했다. 항해기도 "이 왕국은 자체적으로 독립하여 통치할 능력이 충분히 있으나 조공을 바치며 중국에 복종하여 왔다. 중국은 이 나라의 여러 파벌싸움을 조장하였고 이로써 이 왕국은 미개 한 상태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무튼 대원군이 집권하는 동안 이러한 제너랄 셔어만호의 사건으로 미국의 함대가 침입한 신미양요가 있었고 병인박해의 결과 프랑스 함대가 침입한 병인양요가 있었다. 이와 같은 통상의 요구에 대한 압력은 유교의 전통에서 교만하고 무례한 것으로 비쳤고 더구나 가까운 중국의 아편전쟁이나 무력통상의 충돌은 결국 대원군과 조선 말기의 정치가들에게 오히려 쐐국정책을 유도하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4.3. 미국 남장로교의 선교사들이 전라도와 충청도에 미친 영향

 

한국에 파견된 선교사들은 그들의 국적과 교파에 따라 상당히 다른 전략과 신학적 배경을 가지고 들어오게 된다. 여기서는 모든 국적과 교파를 다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이 연구의 범위에 맞추기 위하여 미국의 남장로교로 범위를 축소하기로 한다. 굳이 남장로교회를 선택하는 이유는 다음 단락에서 설명이 되겠지만 그들의 선교 지역이 호남과 충청도로 결정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미국의 장로교회가 왜 갈려 지게 되었는지 이미 잘 연구되어졌고 이제 다시 통합의 길에 들어섰기에 많은 설명은 생략하고 간단히 그 두 교회의 차이점과 그들이 한국 선교의 역활에 대하여 설명코자 한다.

 

19세기 미국의 장로교회는 제 2차 대 부흥운동과 이민으로 인한 인구의 증가로 많은 목회자들을 필요로 했지만 수준 높은 목회자를 양성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리게 됨에 교회 내에서는 회중교회와 합동하여 분산된 힘을 모으고 또 대 부흥운동의 역사는 철저하게 잘 교육된 교리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단순한 설교에 그 원인이 있었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교리교육 보다는 설교를 잘 할 수 있는 자에게 누구나 목사 안수를 허락해야 한다는 의견이 강하게 일어나면서 그렇지 않은 즉 전통적인 신학교육을 주장하는 스코트랜드-아일랜드 계통의 목사들인 보수파 또는 구학파 (Old School)와 칼뱅주의 신앙을 버리고 자유주의 신학을 위하고 있다고 비난 받던 회중교회 출신의 목사들로 진보파 또는 신학파(New School)로 맞서게 되었다. 결국 1837년 총회에서 프린스톤 신학교를 중심으로 보수파 또는 구학파와 뉴욕 유니온 신학교를 중심으로 하는 신학파 또는 진보파로 갈라지게 되었다. 이러한 교회의 갈라짐은 선교에서도 그대로 나타나서 진보파는 초교파적 선교 사역을 지지하였고 보수파는 선교부를 총회가 직접 단독으로 관장하려고 하였다. 아 분열은 다시 남북 전쟁으로 남쪽의 구학파와 신학파가 합하여 남장로교회를(1864) 그리고 북쪽의 新舊학파가 북장로교회(1870)를 구성하여 1983년 연합이 될 때까지 서로 다른 노선을 걷게 되었다.

따라서 장로교 선교부들간에 선교지역의 분활은 장로교미션공의회(The Council of Missions Holding the Presbyterian Form of Government)를 통해 이루어지게 되었고 한국에서는 북장로교회 출신인 의료 선교사 빈톤(C. C. Vinton)의 집에서 이러한 미션회의를 갖고 북장로교회는 이미 북장로교회에서 개척한황해도, 평안도와 서울 지역을 후에는 대구와 안동 지역이 추가 되었고 남장로교회 선교사들은 호남지역을 담당하게 하였고 나중에는 금강 유역의 충청도까지로 확대되었다. 따라서 남장로교회 선교사들 테이트(Lewis B. Tate) 레이놀즈와 부인 팻시 볼링(Patsy Bolling), 전킨세 목사와 부인 메리 레이번(Mary Layburn), 테이트 목사의 여동생인 테이트(Mattie S. Tate)와 리니 데이비스 (Linnie Davis) 7명이었다.

 

이런 이유에서 본 논문은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사들의 1차 기록들을 읽어 가면서 그들의 경제 사상을 분석하고 설명하는데 그 초점이 있다.

다음의 1차 자료들이 본 연구에 많은 도움을 줄 것을 기대하나 유감스럽게도 개인이 쉽게 접할 수 없는 방대한 자료들인데다 짧은 시일에 이 연구 초안을 구성하느라 거의 참고하지 못한 것들이다.

 

-Annual Reports of Presbyterian Church U. S. in Korea Missionary.

-Annual Report of General Council of Protestant Missions in Korea.

-Mission to Korea. George Thompson Brown.

-Reports of the Southern Presbyterian Mission in Korea. 1903.

-The Missionart Review of the World.

-The Korea Mission Field.

 

따라서 이 논문의 진행과정에서 필요에 따라 1차 자료의 번역과 병행하여 연구를 진행하게 될 것이다. 다음 참고 문헌은 짧은 시간 내에 이 초안을 위한 책들로 대부분은 국내에 소장된 것들이지만 Winfired Scharlau의 책이나 토니(Tawney)의 독일어 판은 구하지 못하고 부분적으로 복사되거나 입수한 본인의 제한된 자료에 의거한 것임을 밝혀둔다.

 

 

연구 참고 문헌

 

A. 외국어 문헌

Luther, M., Kleiner Sermon vom Wucher, 1519, in Werke Weimarausgabe. Vol. 6.

Kaufshandlung und Wucher, 1520, pp.33-60

Von Kaufshandlung und Wucher, 1524, Vol. 15, pp. 279-322

Großer Sermon von Wucher, Werke, Vol. 6 .

An die Pfarrherrn wider den Wucher zu predigen, Vermahnung, 1540, Vol. 51, pp. 325-424.

An den christlichen Adel deutscher Nation (1520), Werke, vol.6 (Weimarer Ausgabe), 381 쪽 이하.

Paul A. Samuelson/William D.Nordhaus, Volkswirtschaftslehre, achte grundlegend überarbeitete deutsche Neuauftrag, vol.1, 2, Bund-Verlag, 1987

Petty, Political Arthmetic, 1690.

Scharlau, W., Gützlaffs Berichte über drei Reisen in den Seeprovinzen Chinas 1831-1833, 1998.

Tawney, R.H., The Abolition of Economic Controls, 1918-1921 (1941), abgedruckt in: History and Society.

Tawney, R.H., Religion und Frühkapitalismus Bern 1946

Tawney, R.H., Religion and the rise of capitalism. London 1926.

Wilsons, Discourse upon Usury, 1925.

 

B. 한국어 문헌

 

경제학원론, 유지성, 김명직, 최동수 공저, 박영사, 2001

기독교와 자본주의의 발흥 , 토니, R. H. 이경식 역, 전망사 1937.

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 1980

브래들리 J. 롱필드(Bradley J. Longfield), 미국장로교회 논쟁(The Presbyterian Controversy), 이은선 역, 아가페문화사 1992.

오덕교, 장로교 교회사, 합동신학교출판부, 1995.

제임스 스마일리(James H. Smylie), 간추린 미국 장로교회사(A Brief History of the Presbyterians), 김인수 역, 대한기독교서회, 1998.

조순, 경제학원론, 법문사, 1974-1987

조순과 정운찬, 경제학원론, 법문사, 1995

종교와 자본주의의 발흥 토니, R. H. 김종철 역, 한길사 1983.

주명준, 전북의 기독교 전래, 전주대학교출판부,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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