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나의 세상 이야기/산 사랑

하얀 솜털꽃 목화밭 ~~

alps 2023. 12. 25. 14:58

몇주전에 덕유산에 다녀오다 동네에서 넘어져 다친 왼쪽 발목에 기브스를 했는데도 여전히 통증이 있어 오늘 덕유산을 가야 하는 날인데 다시 다칠까봐 거친 산행을 포기하고 조심조심 올라 본 호명호수다. 3킬로 좀 넘는 능선 길에 올라서니 이 처럼 하얀 목화 꽃이 나를 반긴다

오늘 "화이트 크리스마스"에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고 찾아 준 내게 보상을 해주나보다 ^^

눈은 여전히 내리고 날씨는 온화해서 산행하기에는 무리가 없는 날이다.

단지 다시 다칠까봐 두 주간이나 집에서 맴돌다 나오니 힘들긴 하다. ~~

정상을 오르는 계단 길은 어서 올라 오라고 유혹하고 ~~

하지만 난 목화밭을 좀 더 걷기로 ~~

목화꽃이 이렇게 활짝 피기전에 꽃망울을 따서 먹으면 달콤했던 기억이 있다. 

어린 시절 이런 걸 다 먹어 보았나 싶을 정도로 나는 아마 초식동물이었나보다. ㅎㅎ

날씨도 온화한데 바람까지 한점 없어 꽃 송이가 더 토실토실하다 ㅎㅎ

아무도 걷지 않은 길을 나 혼자 어린 시절을 그리며 여유있게 걷고 있다. 

인솔을 가면 대원들 챙기느라 분주하다 이런 여유가 ㅎㅎ

9시인데도 단 한사람도 찾아보기 힘든 목화 밭은 수확을 기다리고 있다. ㅎㅎ

동네를 휘돌아다니며 무언가 줏어 먹던 동네 강아지 처럼 이것저것 잘 챙겨 먹었어도 늘상 아프고 바짝 마른 나의 그래서 "젖가락, 갈비씨" 가 늘상 따라다니던 별명이고보니 어쩌다 아픈 몸을 이끌고 등교를 하지만 결국은 급우의 등에 엎혀 집으로 돌아오곤 했었으니 엄니에게는 참으로 마음 아픈 아이였을 것이다.

얼마나 가벼웠길래 아직도 동창회를 가면 여동창들이 '나를 집에 업어다 주겠다'고 옛날에 선생님에게 떼를 썼었다는 얘기를 자랑스럽게하며 여전히 그 여학생은  지금은 60킬로인 나를 얕잡아본다. ~~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내 몸무게는 성인이 되어 군에 입대 할 때 신체 검사에서 53 킬로 였다는 것이니 초딩 때는 당연 이보다는 가벼웠겠지 ? ㅎㅎ  ~~

하긴 저 가벼운 목화 꽃을 얼마나 따 먹어야 몸무게가 늘까? ㅎㅎ

그래서 일년에 26번이나 결석을 한 너무 빈약한 나였으니 지금 생각하면 어머니에게 참으로 불효막심한 막내 아들이었다.

30년만에 처음 찾아간 동창회에서 나를 알아 보는 사람들은 단 한명도 없이 오히려 "혹시 졸업 년도를 잘못 아시고 오신 것 아니시냐?" 고 동창회장이 질문할 만큼 난 낯선 사람이었다. 

그래서 '6학년 5반 아무개' 라고 하자 동창 몇몇이 동시에 "어 저녀석 죽은 줄 알았는데 ~~" 라고 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정도로 그들을 놀라게 했었다.

그렇게 '당연히 오래 전에 죽은 줄'로만 알았던 내가 아직 살아서 호명호수를 오르고 있는 것이다 ㅎㅎ

하긴 초식동물이라 남들이 잘 먹는 개고기도 돼지고기도 닭고기도 잘 안 먹고 저 가벼운 목화꽃이나 진달래꽃, 산딸기나 따서 먹었으니 무거울리 없겠지? ㅎㅎ

지금은 잡식동물로 변하여 이런저런 고기들도 안가리고 잘 먹어선지 몸무게가 60 킬로 이하로 내려가지를 않으려 한다. ㅋㅋ

 

걱정마!

이젠 식성이 변하여 너희들 안 따 먹을 테니 ㅎㅎ

멋진 잣나무 길도 오늘은 아무도 지나 간 흔적이 없는 자연의 모습 그대로 조용하고 평온하다 

하긴 오늘 내가 올라오면서 마주친 사람이 한사람도 없었으니  ~~

어제 지나간 흔적들이 오늘 쌓은 눈 속에서도 아련한 추억을 남기고 ~~

나 홀로 걷기에는 너무 아깝다

멋진 잣나무 숲길이 군인들이 제식 훈련 하듯이 길게 정열하고 있다. 

그리고 길가에는 전선으로 떠나는 병사들을 전송하려는 학생들의 손짓들 같이 정겹게 환영하고 ㅎㅎ

그래서 하염없이 걸어보는 멋진 산책로에는 옛날의 추억들이 맴돌아 찾아 온다. 

어릴때 집 앞 마당의 나무가 저리 크지는 않았지만 오늘같은 성탄절에는 방울이며 꽃이며 무언가 주렁주렁 매달았고 

나 혼자 안되면 동네 친구들 모두 불러다가 저 나무끝에도 반짝이는 별을 달았던 그 낭만은 이미 돌아가신지 오래고 ㅠㅠ

내가 걸어 온 길은 정겨운 추억은 사라지고 그저 무의미한 발자욱만 남기었는가? ㅠㅠ

호명호수를 오르는 길에 늘어선 소나무들은 여전히 건재하시다 

한양공대에서 분필 가루를 나눠 마시던 네 사람이 의견이 맞아 이렇게 하얀 눈이 내린 날 이 곳을 지나 갈 때와는 별로 달라진게 없는데 ~~

저 길을 걸으며 남겼던 추억의 네 사람중 세 사람은 벌써 은퇴를 하고 단 한 분만이 현직에 외롭게 남아 자릴 지키고 계시다.

물론 나야 연령상 은퇴할 나이에 은퇴를 했으나 연이어 두분은 자진 은퇴를 하셧으니 시간적 여유가 훨씬 많아졌는데도 십년 전에 와 본 이 곳에 아직 오지를 못한다  

글쎄 언제 다시 이 길을 넷이서 걸어 볼수 있을까? 

학교 운동장에 저렇게 쌓인 눈을 보면 누구나 그렇듯이 발자욱을 남기기 위해 쏘다녔듯이 

10대 시절에 이런 흰 백지 위에 제도용 먹물로 3000 여장의  만화삽화를 그렸었고 26권의  일기를 적었었다.

그때 나보다 잘 그렸던 친구는 어린 나이에도 극장포스터 그리는 화공의 조수로 들어가서 그  친구와 나는 모든 영화가 공짜여서 무척이나 영화를 보러다녀서 그런지 오히려 성인이 되어서는 극장은 물론 그 흔한 드라마 한편을 안본다!

그래서 커다란 TV가 자리 차지하는게 싫어 어느 교회에 기증해버리고 벌써 십년이 넘게 TV없이 산다,

죽을 때가 돼서 그런가?

조용한게 좋다!

그래서 대원들 인솔을 가지 않으면 씨끄런 산보다는 이렇게 조용한 산을 찾아 온다, 

살면서 수없는 이사를 통해 그 많던 일기 중에 한두어권과 그림 200 여장이 겨우 살아남았다.

산과 강을 그리고  빈 여백에 시를 적었지만 결국은 나를 그리고 내 마음을 그렷나보다.

많은 시들 중에 박목월씨 시를 유독 많이 쓰다보니 저절로 외우게 되었고 그래선지 우연히 대학때 살던 집이 박목월씨 옆집이 되어 이른 새벽에 독서실을 항하는 나랑 한강변을 산책하시는 방향이 같아  종종 말없이 같이 걸었었다

 괴테의 시를 좋아했는데 이젠 지난 일이 되었지만 결국은 그가 남긴 추억의 독일도시들에 살게 되었었다.

이렇게 흰 백지 위에 무엇을 담느냐가 결국은 나의 인생이 되었다

저 끝이 보이지 않는 길 뒤에 무엇이 나타날지를 미리 걱정해 본적이 없이 바삐 삶을 그려야 했다.

너무 가난한데다 교육열도 없으신 아버님은 65명 초딩 졸업생이 모두 진학하던 중학교를 그리고 대부분 이어 가던 고교를 내게는 허락되지 않아서 그릴 수 없었던 학창 시절이지만 결국 재대 후에야 찾아 온 공부할 기회를 놓치지 않고 10년이 넘게 지각한 중학교 검정고시를 8개월에 다시 고졸  8개월에 합격해서 3~4년의 학업을 단축했으나 남들이 동기들과 교정에서 경험했던 학창 시절이 내게는 없다.

다시 주어 진 백지 위에 총무처 5급 공무원 시험 합격으로 공무원이란 그림을 그리려 했으나 나의 학업에 도움을 주시던 누님의 반대로 최종 관문인 신체검사까지는 가지 못하고 내 주제에 맞지 않은 법학의 길을 가게 했으나 잘못 그려진 스케치였다.

지독한 영양실조로 폐결핵이 진단서를 쥐어주던 의사는 '고시 공부를 포기하지 않으면 죽는다'고 경고하였었다.

그래서 시작한 직장 생활 속에서 동료 여직원이 독일 유학을 떠나며 준 조언이 결국은 비행기 값을 제외하면 3개월 생활비를 가지고 먼 유럽 유학길에 오르게 했다.

유학 3개월이 되던 85년 성탄절 때 남아 있는 나의 총재산은 30마르크 한화로 18,000원이었다. 알바를 하며 공부 할수 있대서 온 유학인데 랭귀지 과정에서는 일을 할수 없다는 유학 선배들의 경고 때문에 큰 벽에 부딯친 것이다

한국에서 이럴 땐 산을 올랐는데 내가 몸담고 있던 뮌스터라는 도시 주위에는 산이 없다.

그래서 하얀 백지 위에 무모한 그림을 그렷다. 

내가 살던 뮌스터라는 도시에서 네델란드 엔세대까지는 150 여킬로를 그 엄동설한에 자전거로 왕복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오늘처럼 온화하지도 않은 매서운 날씨에 캄캄한 새벽에 떠나 다시 캄캄해진 기숙사에 무사히 살아 도착했지만 손가락들의 동상으로 방문을 열수가 없었다.

동상으로 두달간 고생했지만 내게 새로운 백지위엔 새로운 그림이 그려지고 있었다.

너무 생활비가 급하니까 생긴 용기 일것이다

학교 직업소개소 노동부 여직원에게 못하는 독일어로 정말 일할 수 없느냐고 물으니까 

일주일이나 한달 짜리 일은 허가되지 않지만 하루짜리 일은 얼마던지 해도 된다는 것이다.

3개월의 나의 후진 독일어 실력으로 희망을 본 것이다

하루만 일하면 당시 한국과 임금격차가 무지 크던 시절이라 일주일 또는 좀 절약하면 두주를 살아 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용기가 가져다 준 행운 위에 유학동기와 결혼까지 성공을 햇지만 하나님은 내게 그런 행복을 오래 부여 하지는 않으셨다

태어난 아들이 막 돐을 넘긴 어느날 교통 경찰관 둘이  집에 찾아와 아내의 학생증을 내밀며 "젤렌도르프 사거리에서 교통사고로 현장에서 즉사하였습니다" 라고 한다.

헤어진지 15분 만에 작별 인사 한마디도 남기지 않은채 한 살 짜리 아이만큼이나 철부지인 내게 이젠 엄마의 역할까지 짊어져야하는 그림을 내가 그려야 한다는 것이다 

아빠로서 엄마로서 학생으로서 또 일을 해야 하는 직장인으로 일인 4역을 한다고 하나님은 내게 남들보다 시간을 두세배 주시지 않으신다

그랬기에 피해는 고스란히 나와 아들의 몫이다

아들이 원하는 장남감 하나 사주지도 못하면서 한 두마디 따스한 대화를 나눌 시간이 없이 새벽 6시에 눈을 뜨면 아들은 탁아소에 오후 5시에 데리고 와서 저녁해서 먹이면 아들도 나도 피곤해서 그 이른 시간에 잠에 골아떨어진다.  

호명호수를 지키는 저 호랑이도 옛날처럼 여전히 건강해 보이고 

봄 여름엔 앉을 자리가 없던 등나무 벤치는 사람대신 흰 눈이 차지하고  양보할 줄을 모른다 ㅎㅎ

아하!

호명호수 유원지는 3개월간 방학이란다 ㅎㅎ

그래서 더욱 인적이 없었나보다 ㅎㅎ

그래서 줄 서서 기다리던 셔틀버스도 덩달아 방학에 들어가셨고 ~~

튼튼한 줄 알았더니 이쪽에서 보니 녀석 갈비뼈만 앙상한 나의 어린 시절 같아 동질감이 느껴진다. ㅎㅎ

어쩌냐?

옛날이나 지금이나 워낙 먹는 욕심이 없어 가져 온 것이라곤 달랑 컵라면과 뜨거운 물 뿐인데 이거라도 먹을래?

물이 많던 때는 호수 위에 헤엄치던 자라는 물따라 바닥으로 내려가셨고 ㅎㅎ

이 호명호수를 건설하다가 순직한 근로자들을 기념한다고 세운 위령탑이 눈 속에 쓸쓸하다. 

위로가 되었으려나?  

암튼 그들의 땀이 어린 호명호수를 내려다 보면 그나마 기분은 좋지 않을까? 

호명호수를 한바퀴 돌아 다시 새로운 백지 위에 섰다. 

이젠 무얼 그릴까?

아이 키우는 것도 30살이 넘어 분가를 해서 내 손 갈일이 없어졌고

쓰던 석사 박사 논문은 마무리 지어서 출간했고  

가르치던 애들은 이제 나이 많다고 그만두시라고 해서 손을 놔서 실업자가 되어 할 일이 없어졌으니 

이제 그릴 것이 많지가 않다.

저 보이지 않는 끝에 나보다 먼저가신 부모님과 누님이 그리고 그리도 급하게 떠났던 아내가 있을까? 

"있다면 ! "

그것을 그릴 수 있으면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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