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인간 아내 '안락사' 80대 남편..우리 사회는 아직 '논쟁 중'
(서울=뉴스1) 윤진희 기자 = 암과 뇌출혈 등에 시달리던 80대 할아버지가 뇌경색으로 수년간 식물인간 상태인 아내를 살해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서울 성북구에 거주하던 권모 할아버지(83)는 2012년 9월쯤부터 뇌경색으로 쓰러진 뒤 식물인간 상태였던 자신의 아내 유모 할머니(81)를 홀로 보살펴 왔다. 권 할아버지 내외는 자녀가 없어 부부를 돌봐줄 사람은 내외뿐이었다.
수년간 노구를 이끌고 식물인간 상태인 할머니를 돌보던 할아버지에게도 병마가 찾아왔다. 아내의 간병을 도맡아하던 권 할아버지 역시 전립선암과 뇌출혈 등의 진단을 받고 수술을 받았다.
권 할아버지는 자신이 죽고 난 뒤의 할머니를 걱정하다 끝내 아내가 고통스럽지 않게 삶을 마감할 수 있도록 자신이 직접 아내의 ‘안락사’를 돕겠다는 결심을 굳힌다.
권 할아버지는 지난해 12월 3일 저녁 병석에 누워있는 아내의 코에 연결된 음식물 주입호스에 다량의 신경안정제를 투약해 할머니를 살해했다. 권 할아버지 역시 약을 복용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시도를 했다.
권 할아버지의 극단적 선택 이틀 후 할머니를 돌봐주던 요양보호사가 집에 방문해 의식이 없이 쓰러진 상태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발견했다. 다행히 권 할아버지는 입원 치료를 받아 간신히 목숨을 구했다. 권 할아버지는 경찰에서 할머니를 “안락사 시켰다”며 순순히 범행을 자백했다. 그리고 권 할아버지는 지난 2월 28일 유서를 남긴 채 결국 할머니의 뒤를 따랐다.
스스로 아내의 목숨을 거둔 할아버지의 행위를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이유야 어쨌든 다른 누군가의 생명을 앗았으니 ‘살인죄’로 처벌해야 할까. 아니면 평생을 함께 한 아내의 존엄한 죽음을 위한 행위로 보고 살인죄에 대한 책임을 덜어주어야 할까. 권 할아버지 사연이 우리 사회에 남긴 숙제다.
◇ 현행법상 ‘적극적 안락사’는 범죄
권 할아버지의 안타까운 사연은 ‘안락사’를 둘러 싼 논란을 함축하고 있다. 이는 권 할아버지가 자신의 아내의 숨을 끊은 이유를 ‘안락사’라고 칭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누군가가 존엄하게 죽고 싶어하더라도 이를 도운 사람의 법적 책임을 면책해 줄 수 있느냐의 문제가 바로 ‘안락사’ 문제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997년 식물인간 상태인 환자를 퇴원시킨 병원 의사와 퇴원을 요구했던 환자의 부인이 살인 방조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보라매 사건’을 계기로 ‘존엄사(death with dignity)’ 논란이 촉발됐다.
그로부터 12년 뒤인 2009년 대법원은 연명치료 중단을 통한 ‘존엄사’ 즉 ‘소극적 안락사’를 인정했다. 대법원이 전원합의체 판결을 통해 존엄사를 인정하자 엄청난 사회적 논란이 일었다. 한 사람이 또 다른 누군가의 죽음을 결정할 수 없다는 종교계의 윤리적 잣대를 기준으로 대법원의 존엄사 인정을 반대했다. 반면 의료계에서는 ‘현실을 모르는 답답한 이야기’라며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법제화로 명확한 기준을 제시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후로도 존엄사에 대한 논의는 계속됐고 결국 ‘소극적 존엄사’를 인정하는 정도로 갈무리 됐다. 그리고 지난해 2월 소위 ‘웰다잉(well dying)법’이 제정 시행되면서 법적 기준도 정착됐다.
◇ 노인 자살률 OECD 최고 수준…'죽을 권리'와 '인간존엄'
행정자치부는 지난 1월 우리나라 주민등록 인구 가운데 65세 이상 인구가 699만명에 이른다고 발표했다. 이는 5169만 명인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13.5%에 달하는 수치다. UN의 분류기준에 따르면 65세 이상 인구가 14%인 경우 고령사회로 분류된다. 고령사회 진입이 초읽기에 접어들었다.
고령화의 급속한 진행 가운데 우리나라의 노인 자살률과 노인 빈곤률은 OECD 최고 수준이다. 빈약한 노인복지 인프라 등이 국민들의 노년의 삶을 잘 보듬지 못하면서 권 할아버지의 사례처럼 홀로 남겨질 병든 배우자를 걱정한 ‘살인’이 벌어지기도 한다.
문제는 빈곤한 노인들뿐만 아니라 말기암 등으로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는 노인들의 자살도 이어지고 있다는 데 있다. 이제 우리 사회도 ‘안락사’를 받아들여야 하는지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지에 대한 헌법적 차원의 논의가 있어야 하는 시점이 도래했다.
안락사를 합법화한 스위스와 네덜란드는 ‘죽을 권리’를 인간의 존엄을 위한 권리로 인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안락사 합법화 논의를 진행했다. 자신이 어디서 어떻게 생을 마감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하나의 기본권으로 인정한 셈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종교계와 시민단체 등의 비판도 만만치 않다.
안락사를 합법으로 인정할 때 등장하는 또 하나의 문제는 바로 ‘조력자’에 대한 면책이다. 근대 형법은 대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에 대한 처벌을 정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자살자’가 목숨을 끊는데 직접적이든 간적접이든 관여한 행위는 ‘불법’으로 인식해 자살 조력자는 처벌하도록 정하고 있다. 이는 우리 형법도 마찬가지다.
결국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는 말기암 환자와 소생 불가능한 사람들에 대한 ‘안락사’를 법적으로 허용한다는 것은 자의적 생명종결에 대한 직간접적 관여를 불법으로 처벌하지 않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안락사에 관여한 자들을 살인이나 자살관여죄로 처벌할 것인가 아니면 일정한 위법성 내지 책임 조각 사유를 인정할 것인가의 문제를 판단해 형법전에 편입시켜야 한다. 인간의 죽음에 관여한 자에 대한 책임을 묻는 근대 형법의 체계가 뒤흔들리게 되는 셈이다.
안락사 법제화가 필요한 순간이 오지 않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이미 노부부의 동반자살시도와 그에 따른 형사처벌 사례가 드물지 않은 사건이 되어가는 것 또한 사실이다. [법조전문기자·법학박사]
jur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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